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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때 찾아온 폐암…월남참전 CEO가 발견한 기적 (동아일보)

이동찬 (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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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창 때 찾아온 폐암…월남참전 CEO가 발견한 기적 [최영해의 THE 이노베이터]

최영해기자 입력 2021-08-29 09:20수정 2021-08-29 09:21 

[임수복 강림CSP 회장 인터뷰]
방사선 항암 치료 거부, 직접 일군 유기농채소 식단으로 체질 바꿔
“서울대 졸업생 보다 농고 출신이 비즈니스 잘해…
사업가는 잘난체 말고 무조건 도와 달라며 고개 숙여야”
한창 일할 때였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쉬지 않고 달려왔다.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 회사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을 때였다. 2004년 어느 날 거침없던 그의 질주는 넘을 수 없을 것 같은 높은 장벽에 멈춰서야 했다. 그의 나이 58세였다. 사업가로서 꽃을 피울 때였다. 돈도 벌고 일에 대한 재미도 한창 붙던 어느 날, 그만 폐암을 선고 받았다. 가난을 벗어나고자 월남에 가 돈을 벌어오겠다고 자원한 베트남전 후유증이 무려 34년 뒤에 스물 스물 불거져 나온 것이다. 거래업체인 일본 회사에서 감사 표시로 건넨 건강검진권이 그에겐 사형 선고장이 돼 버렸다. 그동안 어떻게 버텨왔는데, 이제 좀 살기 시작하니까 찾아온 병마(病魔), 하느님이 야속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이…” 말문이 막혔다. 걷잡을 수 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이제 어떡하나, 눈앞이 깜깜했다. 월남전 참전용사 출신 기업인 강림CSP 임수복 회장(74)의 얘기다. 


주산선수 출신 신경쇠약증 극복하려 군대 자원

임수복 강림CSP 회장은 베트남 참전용사였다. 2004년 폐암을 선고받았지만 암 종양 제거 수술 후 항암치료를 거부하고도 지금까지 건강하게 살고 있다. 이훈구 기자 ufo@donga.com


그는 밀양실업고 상학과를 졸업했다. 주산을 잘해 주산 선수로 활동했다. 그런데 뇌 신경쇠약이라는 병이 몸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주산 선수 출신은 군대 가면 경리단으로 뽑힐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의사는 “스트레스를 받지 않으려면 경리단에 가지 말고 공병에 지원해 노동을 하는 것이 좋다”고 권했다. 머리를 쓰지 않고 삽으로 하루 종일 일하는 거였다. 몸으로 때우면 스트레스를 받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아침부터 삽을 메고 작업장으로 나가 하루 종일 일했다. 1주일 하고 나니 진이 빠졌다. 군 고참이 위생병으로 주특기를 받으면 여기보단 나을 것이라고 귀띔해줬다. 어영부영하다간 경리단으로 끌려갈 판이었다. 군종(軍宗) 신부님을 찾아가 하소연했다. 군에서도 주산을 계속하면 신경쇠약증이 도질 것 같다고 토로했다. 신부님 덕분에 2개월 동안 위생병 훈련을 받고 양구 21사단 의무중대에 배치됐다.


위생병으로 어느 정도 일을 익힐 무렵 월남전 참전 군인을 뽑았다. 서로 안 가려고 했지만 수복은 달랐다. 가정형편이 어려웠던 그는 월남전에 파병돼 돈을 꽤 벌었다는 사람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이왕 군 생활할 거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는 대로 가자”고 다짐했다. 1969년 1월 월남으로 가는 배에 몸을 실었다. 베트남 나트랑 항구에 도착하자 육군 대위 한 사람이 배에 올라왔다. 대위는 축구선수로 뛸 사람을 찾았다. 공교롭게도 그는 양구에서 복무할 때 수복을 아는 의무중대장이었다. 수복을 축구선수로 뽑아 나중에 후송병원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줬다. ‘인연이란 게 이렇구나’라는 것을 실감했다.


“정말 운이 좋았지요. 그때 전투병으로 간 군인들은 절반가량 죽어 돌아왔습니다. 위생병은 부상병을 후송하는 일을 맡았는데, 나는 다행히 병원에 떨어졌으니 이런 행운이 없었어요.”


하지만 나트랑 102후송병원에도 미군들이 공중에 뿌린 고엽제로 뒤덮였다. 베트콩들이 땅굴을 파 숨으니까 미군은 비행기로 고엽제를 뿌리면서 나무를 다 말려 죽였다. 위생병이던 임수복도 고엽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사업 실패한 아버지는 술주정뱅이, 고단한 어린 시절 

임수복 강림CSP 회장이 부산 강서구에 위치한 동양 최대의 스틸센터에서 포즈를 취했다. 사진 가톨릭평화신문 제공 


수복의 가정은 원래 부유한 편이었다. 아버지가 대동아전쟁 때 일본 조선소에서 기술자로 일했다. 형도 일본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전후 떡 공장과 과자 공장을 하던 아버지가 사업에 실패하면서 가세(家勢)가 급격히 기울었다. 이후 아버지는 술에 절어 살았다. 초등학교를 다니던 수복은 아이스께끼 통을 메고 거리에 나섰다. 주산을 잘 해 중학교 때 주산책과 수학책을 프린트해 책으로 엮어 팔다가 학교에서 유기 정학을 맞기도 했다. 뭐라도 해야 입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던 시절이었다.

밀양실업고 3학년 때인 1965년 11월, 졸업도 하기 전에 취직을 했다. 부산저금관리국 5급을6 공무원에 합격했다. 정직원 월급이 4200원으로 하숙비 1700원을 내면 손에 쥐는 게 별로 없었다. 공무원이라 빨간 날은 다 놀게 해줘 몸은 멀쩡한데 주머니는 가벼웠다.

그래서 지인 소개로 철강회사에 입사했다. 천일철강에서 경리도 보고 저녁엔 숙직도 했다. 월급이 9000원으로 뛰어올랐다. 이게 평생 직업이 됐다. 여전히 신경쇠약을 겪고 있던 수복은 병을 극복하기 위해 서둘러 군대를 자원한다. 제대하는 날 철강회사 사장님은 수복을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서 6년을 더 일했다. ‘밀양 촌놈’이 부산에 아는 사람이 있을 리가 없었다. 내세울 만한 학력도, 인맥도, 돈도 없었다. 시키는 대로 일했다. 뭐든지 하나라도 배우려고 했다. 자기를 낮추니 수복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던 어느 날 운명 같은 일이 벌어졌다. 큰 거래처인 대선조선이 자금난으로 6개월짜리 어음을 천일철강에 끊어준 것이 화근이 됐다. 대선조선 회장과 천일철강 사장은 로터리클럽 회원이었다. 납품회사인 천일철강 사장이 공개석상에서 “이렇게 돈을 늦게 주면 우리는 어떻게 먹고 사나”면서 대선조선 회장에게 불평을 토로한 것이 큰 문제가 됐다.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한 대선조선 회장이 며칠 후 거래를 끊겠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한 것이다. 대선조선 상무가 영업부장이던 수복에게 먼저 귀띔해줬다. “회장님이 거래를 끊기로 했으니 임 부장이 나가서 독립하면 밀어 주겠다”고 한 것이다.



우연한 독립의 기회

“난감했지요. 다니던 회사를 하루아침에 정리하는 것도 도의상 그렇고, 큰 거래처에서 독립하면 도와주겠다고 하니 한편으론 맘이 끌렸어요. 월급쟁이가 자립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인데 기회를 놓치면 평생 남 밑에서 일해야 할 거 같았어요. 마침 집사람이 교편을 잡고 있어 안정적인 편이라 한번 해보자고 결심했어요.”

임수복 회장이 서울 용산구에 위치한 서울사무소에서 동아일보와 인터뷰하고 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웠던 청년 시절 돈을 벌기 위해 베트남전에 참전한 상황을 회상하고 있다. 이훈구 기자


그의 나이 29세 때였다. 회사를 나오니 의외로 도와주는 사람이 많았다. 1976년 강림파이프상사 간판을 달고 조그만 가게를 얻었다. 여직원 한 명을 두고 수복은 영업과 수금을 하면서 일에 몰두했다. 사업을 시작하면서 3가지 원칙을 세웠다.

첫째, 남을 가르치려 하지 말라. 잘난체 하면 절대 안 된다. 무조건 도와달라고 한다. 배우겠다고 나선다.

둘째, 말을 많이 하지 말라. 많이 듣고 배우고 모르는 게 있으면 물어라. 먼저 말을 많이 하는 것은 금물이다.

셋째, 낮은 자세로 일하라. 당신 부하가 될 테니까 시켜만 달라고 한다.

이 3가지를 몸으로 익히니 주변에서 싫어하는 사람이 없었다. 주문이 쏟아졌다. 거래처 사람들이 술을 마시다가 돈이 떨어지면 그에게 주저 않고 전화를 걸었다. 새벽 1시든 2시든 자다가도 일어나 달려 나갔다. 그리고 다 해결해줬다. 사업 후 15년가량은 무척 힘이 들었다. 1980년~90년대는 가장 어려운 시기였다. 자금이 없어 쩔쩔 매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새벽 5시에 은행지점장 집을 찾아가 무릎을 꿇었습니다. 제발 도와달라고 애원했습니다. 담보도 없고 아무 것도 없는데도 저를 믿고 도와준 분이 한 두 분 계셨어요. 꿇어앉고 빌었어요. 무엇보다 신용이 중요했지요. 내 몸 하나 아파서 누우면 아무 것도 안 되는 때를 이렇게 겨우 넘겼습니다.”

돈도 백도 없는 수복에게 낮은 자세는 경영철학이자 신조였다. 지금도 누구를 만나더라도 자세를 낮추는 것이 몸에 배어있다.


 

도요타자동차의 JIT 시스템을 한국에 도입

임수복 회장이 한 기업에서 주최한 기업가정신 콘서트에서 기업인들을 대상으로 강연하고 있다. 사진 강림CSP 제공 


타고 난 성실함과 매사에 낮은 자세로 일하는 임 사장에게 기회는 찾아왔다. 조선소 선박 건조에 필요한 강관을 수입해 파는 것이 주요 비즈니스였다. 일본의 한 기업이 물건을 안정적으로 조달해줘 순조롭게 사업이 진행됐다. 임 사장은 일본 도요타자동차를 견학하면서 당시 국내에선 생소한 JIT(Just In Time) 시스템을 눈으로 직접 보고 ‘이거다’ 싶었다. 국내 조선업체들은 강관을 일본에서 수입해 썼는데, 품귀 현상이나 극심한 가격 변동에 대비해 필요한 분량보다 20~30%를 더 사와 야적장에 쌓아놓고 있었다.

임 사장은 부산 영도의 대한조선공사(현 한진중공업)에 필요한 만큼만 조달해 주는 JIT 시스템으로 물량을 공급하겠다고 약속했다. 조선소로선 야적장에 비상으로 쌓아둬 녹슬고 폐기되는 물량을 비축해 놓을 필요가 없어 좋았다. 무계목(無繼目) 강관을 스미토모, 관서강관 등에서 수입해 납품했다. 이 제품은 용접을 통해 이어 붙이지 않고 봉강을 뚫어 만든 파이프로 높은 열에도 잘 견뎌내 조선 석유화학 해양플랜트 등에 사용된다.

대한조선공사에서 비용을 30%나 줄인 사실이 알려지자 그동안 꿈쩍도 않던 대우조선 현대중공업 삼성중공업 등 대기업에서 임 사장 물량을 앞 다퉈 납품받았다. 화학회사들도 임 사장을 찾았다. 사업은 날로 번창했다. 


건강검진권으로 받은 폐암 선고


그 어렵던 1980년대와 90년대를 벗어난 임 사장에게 2004년 청천벽력 같은 일이 벌어진다. 일본 거래회사에서 감사의 표시로 건넨 동경여자의과대학 건강검진권으로 검사 받은 결과 폐암 판정을 받았다.

임수복 회장이 장학재단을 통해 학생들에게 장학증서를 수여하고 있다. 

임수복장학재단은 20억원의 출연금으로 매년 8000여만 원의 장학금을 준다. 사진 강림CSP 제공


‘어떻게 살아왔는데 나에게 이런 일이…’

동경여자의대 부속병원에서 1.7cm 암 종양 제거 수술을 받았다. 베트남전에 참전한 지 34년 만에 발견된 폐암이었다. 불행 중 다행일까, 폐암 초기였다. 병원에선 항암 치료를 시작하자고 했다. 고엽제에서 나온 다이옥신 후유증이었다. 임 사장은 손사래를 쳤다. 군위생병으로 복무하면서 방사선 치료의 후유증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암 세포 하나를 죽이기 위해 멀쩡한 주변 세포가 얼마나 죽어나가는지를 봤다. 방사선 치료로 살아나는 사람은 30~40% 밖에 안 된다는 사실을 몸으로 체득했던 터였다.

이제 죽는다고 생각하니까 막막했다. 실제로 죽을 준비를 했다. 자산과 부동산 등 아이들에게 갈라줄 몫을 나눴다. 장학재단을 만들어 20억원을 출연하고, 50억원으로 문화재단을 만들어 청소년들을 도울 돈을 먼저 마련했다. 그동안 사회로부터 받은 것을 조금이나마 돌려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항암 치료를 한사코 거부한 임 사장은 고향인 밀양에 만든 농장에서 재배한 유기농 채소로 병을 극복하기로 마음을 다잡았다. 일본에서 만난 대체의학자들을 통해 혈액을 관리하면 암도 치료할 수 있다고 믿게 됐다. 임 사장은 1990년대 후반 밀양에 유기농채소 농장을 일궈 농림부로부터 신농업지식인으로 2004년 선정되기도 했다. 비료를 일절 쓰지 않고 퇴비로 키운 농작물로 식단을 마련했다. 그리고 좋은 물을 찾아 마셨다. 몸을 알칼리로 만들어 암에 맞서는 것이었다.

천주교 신자인 그는 성당에서 하느님에게 기도했다. ‘건강만 돌아올 수 있도록 해준다면 모든 것을 다 내려놓겠다’고 호소했다. 기적 같은 일이 벌어졌다. 항암 치료를 하지 않았는데도 암은 더 이상 번지지 않았다. 일본에 가서 3개월에 한번씩 체크만 했다. 17년이 지났지만 임 사장은 멀쩡하다. 의학적으로도 폐암에서 완치된 것이다. 생 들깨에서 식물성 오메가3를 추출해 꾸준히 복용했다. 생선에서 추출한 동물성 오메가3와는 다른 것으로 임 사장은 국내 특허까지 받았다. 2008년 밀양에 오가닉 농장도 설립했다. 


유기농 식단 임직원과 함께 나눠

수술을 받고 난 뒤 몇 년 동안 임 사장은 회사 경영에 몰두할 수 없었다. 수술 후 5년가량 지난 뒤 임직원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았다.

부산 데레사여고에서 임수복회장이 강연 후 학생들과 함께 사진을 찍었다. 사진 강림CSP 제공 


“내가 암 수술 받은 뒤 회사 일을 제대로 챙기지 못 했는데도 열심히 해줘 고맙습니다. 노고를 잊지 않고 보답하겠습니다. 내가 암을 이겨낸 것이 유기농 채소였습니다. 내가 먹는 것과 똑 같은 식단을 여러분에게 함께 내놓겠습니다. 그리고 건강검진비를 회사에서 매년 지원하겠습니다. 단 담배는 무조건 끊어야 합니다.”

이 회사의 한 끼 식단은 원가로 1만500원이다. 그는 회사 직원에게 지금까지도 무료로 유기농 야채로 짠 식사를 제공하고 있다. 2012년 수출 2억불 달성을 일궈냈다. 외형은 3500억원까지 커졌다. 투병 당시 회사 경영의 전권을 맡긴 한 임원이 사고를 치면서 한때 회사 경영이 휘청거리기도 했지만, 임 회장이 경영에 복귀하면서 정상화됐다.

그러나 최근엔 글로벌 경쟁이 치열해지고 조선 석유화학 등 강관 수요처의 업황 불황으로 고전하고 있다. 주 52시간제 시행과 최저임금 인상 등은 중소기업에겐 큰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한다. 


‘금수저’ 청년들에게 

임 회장은 삼성생명에서 진행하는 중견기업 2세 교육 프로그램에서 수년 째 강사로 나서고 있다. 거제 삼성중공업을 견학한 뒤 강림CSP를 방문하는 이들에게 멘토링을 한다.

“사람이 태어나 성공하려면 큰 강을 건너야 합니다. 판검사든 장차관이든 과학자든 사업가든 그 누구도 큰 강을 지나지 않고선 결코 성공할 수 없습니다. 강을 건너는 과정에서 죽는 사람도 나오고, 부상자도 속출하고, 심지어 불구자가 되기도 합니다. 이 강을 무사히 지나 성공하는 사람도 있지요. 여러분은 강 건너에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 강을 건널 필요도 없었지만, 도강(渡江) 훈련도 못한 사람들은 70% 이상 망하게 돼 있습니다. 의지가 약하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잘 만나 처음부터 이사 달고 상무 달게 아니라 바닥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젊었을 때 고생해야 늙어서 고생하지 않습니다. 사회에서 성공하려면 봉사도 하고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기업을 만들어야 합니다. 골프치고 돌아다녀선 안 됩니다.”

임수복 회장은 신지식농업인 겸 기업경영인으로 과테말라 명예영사에 추대됐다. 

주한 과테말라대사와 함께 포즈를 취했다. 사진 강림CSP 제공


청년들에겐 할 말이 없을까.

“해보지도 않고 안 된다, 못 한다 할 일이 아닙니다. 아버지가 돈도 없고, 백도 없다고 하지 말고 찾아보면 할일이 많습니다. 주식으로 한 방에 벌려고 하지 말고 자기가 할 일을 찬찬히 찾아보기를 바랍니다.”
 


미리 쓴 자서전, 77세 때 세상에 내놓을 것


임 회장은 2004년 폐암 수술을 받은 후 5년 안에 죽을 것으로 생각하고 자서전을 썼다. 그런데 5년을 넘기고, 또 다시 10년을 넘겨 17년이 지난 지금까지 아무 탈 없이 살고 있다. 밀양초등학교 후배인 작가 이문열 씨에게 자서전을 보내자 이문열은 “책을 쓰신 선배님께 박수를 보낸다”고 격려했다고 한다. 임 회장은 77세 되는 해 자서전을 발간할 계획이다.


그는 요즘 어떤 생각을 하면서 살까.


“서울대 졸업생보다 농고 나온 사람들이 비즈니스를 더 잘 합니다. 사업가는 스스로 바보가 돼야 합니다. 항상 고개 숙이고 도와 달라고 하고 가르쳐 달라고 해야 합니다. 굳건하게 의지를 갖고 하면 안 되는 일이 없습니다. 똑똑한 체 하고 말 많은 사람을 누구도 좋아하지 않습디다.”


    임수복 회장이 정부로부터 받은 수출탑 앞에서 수출 2억 불 달성 당시를 회고하고 있다. 

요즘은 글로벌 경쟁이 치열한데다 기업 경영 환경도 어려워 사업하기가 쉽지 않다고 토로했다. 이훈구 기자


주변에서 도움을 많이 받아 사업을 키운 그는 이젠 지인들을 돕겠다는 자세로 살고 있다. 폐암 수술 후인 2006년 국가는 그를 베트남전 고엽제 후유증 국가유공자 5급으로 지정했다. 1976년 불모지나 다름없는 철강산업에 투신해 변변한 하치장 하나 없이 맨손으로 파이프를 입출고하던 그가 지금은 부산에 대지 1만 평(3만3000㎡)나 되는 동양 최대의 스틸센터를 갖고 있다. ‘유기농 전도사’로 불리는 임 회장은 유기농 들깨유로 만든 오메가3 뷰티화장품을 생산하는 직영농장을 고향인 밀양에서 여전히 일구고 있다.

최영해기자 yhchoi65@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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